THE INTIMATE ORWELL
SIMON LEYS |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 MAY 26, 2011 VOL. 58, NUMBER 9
“오웰의 사생활.” (The intimate Orwell.)
오웰이 적었던 일기나 썼던 편지들에 관한 책을 평하는 글이므로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게 적절할 듯싶지만 기실 이러한 제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마치 에릭 블레어 (오웰의 본명)와 조지 오웰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다는 식으로 독자가 잘못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물론, 에릭 블레어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고 말이 없었으며 사교에 서투른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조지 오웰은 펜 (때로는 총)을 든 투사였다는 차이점은 분명히 있으되 에릭 블레어라는 사인私人과 조지 오웰이라는 공인公人 사이에 동떨어진 인격이 있는 게 아니라 둘은 하나로 뭉쳐서 하나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인격을 만들어낸다. 그의 생전에 그와 사이가 가까웠던 사람들의 진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가 “정말 단순한” 사람이었다는 것, “야만인과 같은 순진함”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애초 몇몇 평론가들 (여기에는 나도 포함된다.)이 추측했던 것과는 달리,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은 딱히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었고 정작 오웰 자신한테는 이렇다 할 의미가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오웰의 첫 출판작 “파리와 런던에서의 빈털터리 삶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1933)”을 내놓을 때만 해도 오웰이 바랐던 것은 그저 부모님 (오웰은 자신의 부모님이 “중상층 가운데 하류층”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지만 돈은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한테 망신을 주지 않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그는 사회적으로 존중 받을 만한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는 바람이 아프도록 강했었다. 오웰의 부모님은 자기 외아들이 그저 무일푼의 떠돌이로서 산 경험을 적은 책이 출판되는 것에 큰 수치감을 느꼈을 터이고, 그러므로 오웰은 본명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고른 필명을 써서 출판한 것일 따름이었다. 기실 거의 출판일이 다 되어서야 고른 게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이었으나, 그 뒤 모든 글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와 저널리즘까지)에서 어쩌다 보니까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게 되어 그 이름이 사회적으로 고착된 것이었을 따름이다.
여태 남아있는 조지 오웰의 일기는 (어떤 것은 유실되었고 일기장 하나는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훔쳐갔다. 아마 모스크바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모두 1998년 피터 데이비슨이 “오웰 전집 (The Complete Works of George Orwell)을 출판할 때 거기에 담기었었는데, 이번에 일기만 묶어서 한 권으로 나왔다. 역시 피터 데이비슨이 편집하여 “일기 (Diaries)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는데, 일기에 더해서 데이비슨의 뛰어난 주석까지 붙어있다. 이 “일기”는 오웰의 일상, 그가 매일같이 마음을 썼던 것들과 흥미로워했던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고 있고 오웰 학자들한테는 관심을 가질 만한 기록들이 수두룩하지만, “이 일기들은 오웰의 삶에 대한 자서전이며 그의 삶 대부분에 관한 스스로의 평론이다.”는 데이비슨의 주장은 과장인 듯싶다. 오히려 이 주장이 딱 들어맞는 책은 역시 데이비슨이 새로 내놓은 책인 “조지 오웰 ─ 편지로 보는 그의 삶”이지 싶다.
오웰의 일기는 고해성사와는 거리가 멀다. 일기에서 오웰은 자신이 품은 느낌이나 받은 인상, 나날의 기분 따위는 거의 적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의견마저도 거의 적지 않았다. 일기에 그가 적은 것은 메마른 ‘팩트’였다. 세상 (또는 자신이 살던 집의 뒤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관한 기록이었다. 오웰이 기르던 염소인 “뮤리엘”이 젖은 꼴을 먹고서 배탈이 났던 것, 처칠이 다시 내각으로 복귀한 것, 만추코에서 일어난 전투, 뒤란에 심은 대황이 잘 자라고 있다는 것, 벨라 쿤이 모스크바에서 저격 당했다는 보도, 팬지꽃과 구름범의귀꽃이 만개하였다는 것, 영국에 쥐의 수가 4~5백만 마리쯤 된다는 보도, 홉 (맥주의 원료)을 따는 일꾼들 사이에서는 “a dig in the grave”가 “a shave”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 1940년 칠월 말에는 독일 침공의 가능성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굳어져서 “산책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들어 주위의 집들을 둘러보았다. 그 가운데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기에 좋은 곳은 어딘가를 살피려고.” 등속의 정보를 그의 일기장에서는 얻을 수 있다.
1946년에 쓴 에세이 “글을 쓰는 까닭 (Why I Write)에서,
내가 소싯적 얻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도, 버릴 수도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땅 위의 것들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들과 쓸모 없는 정보 부스러기들에서 기쁨을 얻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듯이, 이러한 식의 “오웰적”인 문장, 구체적 사물과 사소한 정보, 땅 위의 것들을 적으면서 ‘다이어리스트’로서의 오웰은 사회심리적인 관찰을 극구 피하고 있다. 막노동꾼으로서의 삶을 적으면서,
막노동꾼의 삶에서 불편함을 떼어낼 수는 없다. 늘 기다리며 서성대야 한다. 봉급을 받는 사람은 다달이 은행에 급료가 입금되고 필요할 때 찾아 쓰면 되지만 일당을 받는 사람은 몸소 찾아가서, 그것도 바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다렸다가, 마치 일당을 나한테 주는 것이 적선이라도 된다는 양, 감지덕지하라는 투로 던져주는 것을 받아야 한다.
식으로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구체적 기술을 하고 있다. 일당을 주는 사무실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차비를 없애가면서) 혹한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던 경험을 적으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 (물론 어떤 한계 내에서)를 하지만, 막노동꾼들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길들여지다 보면 이른바 ‘권위’라는 것, ‘당국’이라는 것한테 신비한 힘이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자신을 그 ‘정부기관’ ‘권위’의 노예로서 여기게 된다. 언젠가 통계자료를 열람하려고 브라운과 셜리 (註─오웰이 광산에서 일할 때 동료들)와 함께 셔필드 시청에 갔는데, 이 두 동무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자기주장이 강하고 거친 사람들이었는데도 시청 문전에서 머뭇대면서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다. 시청 직원이 자신들한테 자료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네한테는 보여주겠지만, 우리한테는 어림없어.”라는 것이었다.
[…]
일기와는 달리 오웰이 쓴 편지들은 그가 흥미로워했던 것, 품고 있던 근심과 열정까지 낱낱이 밝히고 있으며 그의 성격 가운데 몇몇 놀라운 면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정치.
오웰은 한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을 “토리 파 무정부주의자”라고 규정했었다. 젊은 시절 잠깐 동안 영국 제국 정부의 경찰로서 버마에서 근무하고 난 후 오웰은 제국주의와 모든 종류의 정치적 압제를 깊이 혐오하게 되었고, 모든 권위를 수상쩍게 여겼으며 “그저 성공하는 것만으로도 남을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할 만큼 온갖 권위에 대거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대공황 기간에 영국 북부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겪은 후에는 당파적이 아닌,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에 헌신하게 된다. “먹물들이 ‘사회주의’에 묻힌 개똥들을 다 씻어낸다면 ‘사회주의’야말로 정의이며 자유”라고 오웰은 믿었다. 그의 정치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파시즘과 싸우려고 오웰은 자원해서 총을 들고 스페인으로 갔고 거의 죽을 뻔했는데, 한번은 파시스트의 총알에 죽을 뻔했고 한번은 스탈린 비밀경찰에 의해 죽을 뻔했다.
내가 스페인에서 목격한 것, 그리고 그 후 좌파 정당들이 안에서는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게 된 이후 나는 정치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분명 “좌파”이되, 작가가 정직하려면 어떤 ‘라벨’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오웰은 그 후 사회주의자의 첫 의무는 전체주의와 싸우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 말은 “소비에트라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다. 파시즘과 스탈리니즘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라는 의미였다. 정치에 대한 글을 편지에서 쓸 때 오웰은 전체주의와 싸우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다. 이 ‘전체주의와의 싸움’에서는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1) 오웰이 구체적 현실을 직관적으로 헤아렸다는 것 (2) 정치에 관해 접근할 때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 (이는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짙은 혐오와 함께였다.) 그리고 (3) ‘사람’이야말로 모든 정치에서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
[…]
문학.
애초부터 오웰이 가장 관심한 것은 문학이었다. 이는 그가 쓴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섯눈뜰 무렵부터 “나는 내가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 말을 죽을 때까지 형태만 바꾸어서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그리고 글을 쓰면서 수많은 땀을 흘린) 후였던 듯싶다. (처음으로 오웰이 문학적 작업을 시도한 것은 긴 시였는데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의 열정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이었다. 그는 이를 저주받은 고통이라고 적고 있다. “소설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다.” 종국에는 “나는 진정한 소설가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짓는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도 친구이자 출판인이었던 프레드릭 바르부크한테 “기막힌 단편소설 소재가 떠올랐어.”하며 흥분해서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모음에서 드러나듯이 오웰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전통적”인 소설 네 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버마 시절 (Burmese Days)”였는데 그 까닭은 자신의 기억과 가장 근사하다는 이유였고, “Keep the Aspidistra Flying (‘아스피디스라’는 영국에서 각 가정마다 기르던 화초인데 전기가 나오기 전 기름등을 쓰던 영국 집에서 기름 때문에 더러워진 공기 속에서 끄떡없고 햇볕을 못 받아도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화초였다. 전기가 나오고서는 전기가 있는 집(따라서 부르주아 이상 가정)에서는 사라졌다.)과 “목사의 딸 (A Clergyman’s Daughter)”은 부끄러워했고, 재판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두 편은 돈 때문에 쓴 작품이다. 당시 내 속에 책을 낼 만한 언턱거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었다.” 나머지 한 편 “숨 들이마시기 (Coming Up for Air)”는 만족해했다. 시작해서 쉬지 않고 끝마쳤던 작품이었고 비교적 수월하게 쓴 작품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환경문제를 다루었다는 면에서 선지자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1946년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의 순위를 매겼는데 (이때는 아직 1984 발표 전이었다.) 그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카탈로니아를 기리며” (Homage to Catalonia)
2. “동물농장” (Animal Farm)
3. “비평 에세이” (Critical Essays)
4. “숨 들이마시기” (Coming Up for Air)
[…]
COMMENT
머리가 받쳐주지 못했으므로 학자가 될 꿈은 애초부터 꾸지 않았지만, 기실 임어당의 말처럼 자신과 “혼의 궁합이 맞는” 작가나 학자, 첫사랑에 빠지듯이 흠뻑 빠지게 되는 작가나 학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학자나 작가가 되기 어렵다. (그리고 깜냥이 되어도 되지 말고 월급쟁이로 살아야 한다.) 물론 나는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첫사랑에 빠지듯 흠뻑 빠진 작가나 학자가 없었지만 (서른 넘어서 아내를 만날 때까지 ‘첫사랑’이라는 걸 못 해본 나한테 이 비유는 적절치 않다.) 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조지 오웰이지 싶다.(학자로서는, 카를 포퍼이다. 두 사람을 묶는 끈은 웬만하면 눈치챌 수 있을 터이다.) 그 동안 조지 오웰 글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Why I Write” “Hanging” )과 오웰 관련글 (“The Invention of George Orwell”)을 몇 번 올렸었지만 (몇 개 더 있는데 이젠 포스트가 1000개를 넘어가니까 글 찾는 것도 어렵다.), 피드를 살피다가 오웰 글이 눈에 띄어서 새벽에 포스트 하나를 했는데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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