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andonedS [59684] · MS 2004 · 쪽지

2012-12-29 21:53:06
조회수 5,431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 각종 훌리들에게 고함.

게시글 주소: https://i1000psi.orbi.kr/0003456907


요즘 게시판이 시끌시끌합니다. 속칭 연훌과 고훌의 싸움도 치열하고, 여튼 쉽게 말해 개판입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우리 학교가 더 좋음'입니다. 좋습니다. 그래요. 자기 학교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거 이해합니다. 근데, 자료가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 들지 않나요?
국회의원 수, 재계 상위권 기업 CEO 수나 임원 수, 고시 합격자 수, 어디서 제대로 어떻게 조사했는지도 모를 이상한 순위자료, 금융권 취업자 수, CPA 합격자 수, 교환학생 수, ... 뭐 기타 등등... 중요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 고작 이러한 것으로 '이런 대단한 학교에 다니는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생각은 너무도 허접하고 치졸한 수작이 아닐까요?

위의 사진은, 아래에 고양이나라님이 올리신 사진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고대생입니다. 제가 고대에 대해 가장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저러한 별 대단하지도 않은 수치가 아닌, 저 사진에서 보여준 저 모습입니다. 4. 19 혁명을 이끌었던 하루 빨리 일어났던 고대생들의 의거. 가장 격렬하게 독재에 저항하면서 무수한 탄압을 받았던 고대의 과거. 그러한 탄압 속에서,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총장님까지 나서곤 했던 아름다운 미담.

좀 가볍게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작년에 타계하신 김준엽 고려대학교 전 총장님 시절, 학생들이 학생회관에서 반정부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5공 시절...ㅋㅋ) 학교에 군경이 진입했고, 학생들은 학관 입구를 봉쇄하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생들이었죠. 스스로를 학관에 가둔 꼴이 된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두려움을 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진압을 막으며 상황을 정리하셨던 분이 바로 총장님이셨습니다. 총장님은 학생들이 갇혀 있는 학관 근처에서 떠나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시면서, 수시로 학관에 있는 학생들에게 방송을 내보내셨습니다. '학생 제군들은 경거망동하지 마라.' '부상자가 생기면 밖으로 내보내라, 구급차를 부르겠다.' '학생 제군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몸부터 챙겨라' '내가 학생 제군들을 지켜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군경도 학생들을 진압하러 가지 않았고, 학생들도 그 안에서 자신들의 시위를 지속했을 뿐 어떠한 충돌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고, 아침까지 학생들을 지켜 주신 총장님 아래에서 시위는 평화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게시판에서 고대가 연대보다 좋은 곳이라고 각종 허접한 자료들을 들이대고 계시는 몇몇 분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고대생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저딴 몇몇 수치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쌓아온 발자취와, 그 속에서 그들이 수호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가치, 그리고 나아가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적어도 이유 없이 공안에 끌려가서 쳐맞지는 않아도 되는' 세상. 고대생이라면, 이러한 것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고 당신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민족고대가 고작 '합격자 수, 취업자 수'로 정의되는 그런 처참하고 저렴한 가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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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생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대학의 학생이건 마찬가지에요.

지금의 대학생들이 세상에 대해 지독하도록 무관심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세상이 학생들을 옥죄어오는 이 현실이 결코 아름다운 것일 수는 없겠지요. 게다가,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갈려 싸워대고, 운동권은 NL과 PD계열로 나뉘고... 서로 으르렁대고 잡아먹을 것 처럼 치졸하게 싸워대다가도 어쩌다가 뭔가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지면 금세 손잡고. 다시 으르렁대고. 이러한 학생사회의 모습은 대학생들에게 더 처절한 무관심을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부분은, 이러한 학생사회가 고착화되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선배들의 탓이 크겠지요. 저도 그러한 선배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때로는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집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관심을 여러분께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아까 위에 언급했던 '저러한 지표'들 따위가 여러분의 대학, 나아가 '여러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지금 살아있고 자신의 길을 정할 수 있는 '여러분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내가 오르비에서 훌리짓을 하는 것이 우리 학교를 위하는 것이라고 혹시나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있다면, 개짓 하지 마세요. 쪽팔립니다. 특히, 고대 학우분들이라면 더더욱이요. 너무나도 기분 상하고, 몸서리쳐집니다. 저런 사람들이 내 선배고, 동기고, 후배라는 사실이 슬플 정도입니다.

적어도, 세상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는 말자구요. 수 년이 지나, 자신이 했던 삽질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러워서 손발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겁니다. 뻔한 건데, 왜 그걸 모르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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