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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현역으로 수능을 치러 정시로 지방교대에 진학할 것이 확실해 진 때,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아침 일찍 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고1 첫학기 중간고사때 영어 전교 2등을 한 성실했던 학생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영어선생님이 다가와 옆에 앉아 말을 건네셨다. 갈 대학을 물으셨다. 내 담임쌤을 통해 내가 대학 세 군데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천성이 문과였던 나를 잘 알고는 공대에 가지 말라고 부모님이 권유한 경북대 문과, 가면 어쨌든 안정적인 워라벨을 누릴 수 있다고 부모님이 권유한 대구교대, 그리고 내가 혼자 진학사 분석해서 쓴 홍익대(서울) 자율전공(자연) 이렇게 합격증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담임쌤께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교대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유를 물으셨다. 넌 소신이 있구나. 이에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1분간 이상한 정적이 흐른 뒤,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영어선생님은 떠났다.
나는 고1 2학기부터 공부를 던지고 내신을 일자로 미는 등의 기행을 저지르며 “시도를 시도”하고 슬럼프에 자습실에서 멍만 때리며 소중한 날들을 아깝게 흘려보내 2년을 날린 상태였다. 이유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연구를 통한 사회적 기여”는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나 같은 범부는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었고, “사명감”은 가져봤자 사회인식이 존경받지 못하고 천한 일이라면 열심히 해봤자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나의 능력에 대한 불신, 자신감과 자존감의 결여로 내가 나로 있는 삶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든 상태였다. 사회의 하찮은 부품으로 전락해 살아가는 것이 싫었으나 나 자신은 너무나 무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내가 앞으로 바뀔 수 있을까? 용기가 부족해 자결을 하지 못했다. 계속 살려면 새로운 목표 설정과 동력이 필요했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상태, 나의 계층적 위치, 내가 있는 나라에 대한 부정을 먼저 했다. 내신과 모교를 부정하는 대상으로 삼고 정시파이터가 되었으며, 선망하는 계층으로 의사를, 유토피아로 일본을 동경했었다. (근데 일본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동경해왔었기도 했고, 한국을 벗어나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판단도 있긴 했다만 인간 행동의 근거는 여러가지니까)
그렇게 앞으로의 길을 잡은 것은 고1 가을이었다. 정시로 지방의대에 진학하고, 일본어 공부해서 JMLE 치고 한국을 떠나 무연고인 일본으로 이민 간다. 그러나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았고 2년간 특유의 자학과 우울감에 휩싸여 공부에 집중하지 않았다. 고3 내내 성적이 그렇게 좋지 못했고 결국 2023학년도 수능 언매미적영어생1지1 백분위(등급) 89 80 1 95 99를 받아버렸다. 의대는커녕 서성한조차 어림도 없는 성적에 부모님은 상경못시키신다고 말씀하셨다. 해도 무휴학 반수를 권하셨고, 나는 어쨌든 이 꿈을 지속하기 위해, 그리고 부모님께 공대는 절대 가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는 반수하기 편한 교대로 갈 것을 장래도 적성도 내다보지 않고 결정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붕괴하는 교대의 입결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초등교사가 되고자 원서썼으리라” 생각한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영어선생님께 그 때 차마 아무 말씀도 못드리고 부끄러워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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